소안의 노래

강한 의지와 정신의 선율, 마음이 부르는 정신의 노래 '소안의 노래'

옥중의 동지를 생각해 요를 깔지 않고 잠을 잤다.
항일운동을 하다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생각해 소안사람들은 엄동설한에도 '요를 깔지 않고 잠을 잤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소안도 사람들을 만나서 항일운동(독립운동)을 했던 이야기를 전해 듣다보면 꼭 하는 이야기이다. 정남국, 정창남, 위경양 등 지도자들이 1928년 조직사건으로('춘경원당'사건) 신의주 감옥에 갇히자 이들의 고초를 생각해 요를 깔지 않고 잠을 잤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을 생각하는 '옥중가'를 지어서 불렀다. 누가 지었고 곡을 붙였는지는 모르지만 지금도 팔순의 노인들은 콧노래처럼 흥얼거린다. 다행스럽게 지난 '소안항일운동사료집'편찬사업을 추진하며 채록되어 전하고 있다.

옥중가
평안북도 마지막 끝 신의주감옥아 이 세상에 생겨난 지 몇해되었나
이제부터 너와 나와 둘 사이에 잊지 못할 관계가 생기었구나
앞 뒤 상펴보니 철갑문이요 곳곳에 보이는 것 붉은 옷이라 슬프도다
감옥에 있는 우리형제들 이런 고생 저런 고생 악행당할 때
두 눈에서 눈물이 비 오듯 하나 장래 일을 생각하니 즐거웁도다
여보시오 같이 나갈 우리 앞길에 추호라도 낙심 말고 같이 나가세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불렀던 창가집(백종화 소장, 완도군항일운동사)

당시 노래는 소안 중화학원과 사립소안학교를 통해 학생들에게, 그리고 마을 야학을 통해서 주민들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보급되었다. 당시 주민들이 불렀던 노래는 '학도가', '독립군가', '행진곡', '이별가', '애국가', '정몽주추모가', '망향가', '조기운동가', '소년단가', '여권신장가', '우승기가', '소년남자', '감동가', '대한혼', '부모은덕가' 등 헤아릴 수 없다.

다른 지역과 달리 소안도 주민들은 민요보다는 혁명가 등을 더 많이 불렀으며, 흔히 섬 지역에서 확인되는 '강강술래' 등은 그 이후에 불렸다고 기억하고 있다. 이런 노래를 필사한 '창가집'을 댓님을 묶은 바짓가랑이 속에 넣어가지고 다니며 배웠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당시 배달청년회나 사립소안학교에서는 '소안극'을 많이 했다고 한다. 당시를 기억 하는 노인(1992년 조사한 내용)은 결혼을 해 막 낳은 자식을 두고 운동을 한다고 가버리는 사람, 투옥된 사람을 대본으로 만들어 '수동이 어머니 노래' 등을 연극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러한 활동들은 주재소 순사들의 감시를 피해서 이루어져야 했다. 당시 일젠느학교와 담을 사이에 둔 민가를 헐고 주재소를 설치해 24시간 철저히 감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토지계정사건에서 승소를 기념한 환여대회에도 소안 중심인 비자리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남쪽 끝 소진리에서 개최하였다. 뿐만 아니라 송내호 등이 주도한 3·1 만세운동과 관련해 태극기 제작은 남쪽 끝 월항리에서 제작하기도 하였다.